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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지나고 난 뒤

경주에서 보낸 여덟 번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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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
경주 남산 소나무 숲

포항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감포항에서 잠시 횟감을 살피며 즐거워한다. 감포는 이름부터 어여쁘니 거기서 ‘감포, 감포’라는 윤택수의 시를 떠올리는 일 또한 언제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좀 더 남쪽으로 문무대왕릉이 있는 해변까지 마저 가면 으레 새우깡 한 봉지를 사게 된다. 저만치 왕릉이라 치는 바위섬에 앉았던 갈매기들이 이쪽 과자 봉지를 든 이를 보고 일제히 저공비행을 시작하는 모양을 보고 싶어서다. 어디 던질 테면 던져봐라, 기가 막히도록 족족 채 가마. 새들은 꽤나 영리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들의 비행에는 심지어 여유가 있어 뵈기도 한다. ‘내 지금 비록 하찮은 과자따위에 날개를 펴고 있으나 엄연히 왕릉을 지키는 수호자이거늘’ 하는 애티튜드쯤 되려나. 그렇게 이번 경주 여행은 새들과
의 새우깡 인사로 시작되었다. 


경주로 들어가기를 몇 번째인지 헤아려보니 얼추 여덟 번이 넘는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있던 다음 해의 중학교 수학여행은 치지 않고서 그렇다. 단시간에 둘러보기로 그때만큼 집중해본 적도 없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어쩌나. 천년 전 신라에서 돌을 쪼아 만든 것은 형형한데 고작 30년 전의 일은 어디에도 없다. 하여 여행자의 질문은 단순하되 여의치 않다. 경주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그리고 나는 경주로부터 무엇을 새로이 남기려 하는가. 문무대왕릉에서 경주 시내 방향으로 차를 몰면 토함산 동쪽 야트막한 자락에 장항리 사지가 있다. 길가에 주차장을 내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고 다시 언덕을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이런 시설물이 있기 전에는 제법 비밀스러운 무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휑하다. 한낮의 햇볕이 나뭇가지 하나 거치지 않으니 쳐다보는 이쪽이 면구스럽기도 하다. 사지에 남은 것은 석탑 두 기와 석불대좌 한 기(불상은 경주박물관 앞뜰에 있다). 원래는 금당터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석탑이 있었을 텐데, 일제강점기 도괴범의 만행으로 폭파되어 산산이 부서졌다가 지금의 배치로 수습되었다 한다. 이런저런 안타까움투성이인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항리 사지는 아름답다. 나란한 두 탑을 이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도 보느라 공연히 걸음에 활기가 돋는다. 서쪽에 있는 오층석탑은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가치가 높고, 동쪽에 있는 석탑은 1층 탑신 위에 그저 지붕돌 다섯 개를 잇달아 얹는 식으로 임시방편 복원해놓은 것인데, 그게 참 미소가 생기도록 어여쁜 형편이 되었다. 투박하니 욕심부리지 않는. 원래가 어떠했든 지금 장항리 절터는 이만큼 아름답다. 절에는 있는 것이 절터엔 없고, 절에는 없는 것이 절터엔 있는 법,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소요와 맥락 사이에서 부디 더 생각할 수 있기를, 그런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가던 길을 달려 이번에는 7번 국도 왼편에 있는 괘릉리 원성왕릉으로 꺾어든다. 나는 모내기가 한창일 적에 여기서 있었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때 거기로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왔더랬다. 인솔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괘릉입니다. 괘릉의 ‘괘(掛)’자는 ‘공중에 매달다’, ‘걸다’, 그런 뜻입니다. 이곳이 연못이었기 때문에, 관을 나무에 매달고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서 있는 바닥을 한 번 보세요. 축축하지요? 여기는 연못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말에 놀란 사람처럼 되어 생각을 재빨리 돌렸다.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다. 왕께서 돌아가시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하필 연못 위에 관을 매달았다. 그리고 큰 칼을 든 외국인(용모와 의상으로 미루어 서역인)과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웃는 사자(한반도에 사자가 살았던 적은 없다)를 돌로 깎아 무덤 앞에 세웠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온통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때로부터 좀 더 나아간 생각이 지금은 머릿속에 있다. 어디에 대고 주장할 바는 아니나, 적어도 원성왕릉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석상들에게 이렇게 말을 붙일 수는 있다. “나는 당신이, 너희들이 어디서 왔는지 압니다. 부디 지혜와 용기로 계속 이곳을 찾게 해주세요.” 

마침 괘릉리의 들은 그 완만하게 펼쳐진 모습이 마치 계절이 드나드는 길목인 양 평화롭다. 봄이 올 때도, 겨울에 들 때도 여기서 맞을 수 있다면 하고 바라게 되니, 헛되도록 평안하다.다음은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는 옥룡암으로 정한다. 경주에 여덟 번 왔다면, 여덟 번 모두 들른 셈인 곳. 나는 여기를 편애하고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높이 9m, 둘레 30m에 이르는 큰 바위가 있으니, 탑과 불상, 비천상과 사자상, 파초나무 등 무려 30여 형상이 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또한 이 바위의 남면에는 여래입상이 하나 서 있어 유난한 여운을 남긴다. 얼굴은 반 이상이 훼손되었으나 그 풍요로운 양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표정이 없는 채로도 가히 아름답다. 바르게 세운 목, 벌어진 어깨, 부푸는 가슴, 잘록한 허리, 침착한 손 모양, 늘어진 옷 주름, 강건한 맨발…. 이 여래입상은 자체의 조각도 훌륭하지만 주변 분위기를 지배하는 따뜻한 공간감을 부여한다는 데 또한 큰 의미를 지닌다. 종교적 제스처를 알지 못하는 채로도 기도하며 합장하는 몸이 되려는 것, 마음의 동요로부터 자꾸 서성거리게 되는 것, 떠날 수 있거나 없거나 내내 돌아온 사람의 포즈가 되는 것. 남산 위를 지나는 해가 온종일 소나무 가지로 스미어 바위에 닿는다. 그늘은 얕거나 깊고 볕은 따사롭다. 안락하다. 꿈이라는 말이 거기서 생겨났다고 해도 나는 믿는다.

이제 박물관에 갈 차례. 국립경주박물관은 자리 잡은 터며, 건축이며, 전시의 내용이며 참으로 간결하게 그때의 신라와 지금의 경주를 이어놓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이미지는 역시 금이다.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과 은과 채색이 많은 나라”라고 기록한다. 11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신라에는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어 개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라고 쓴다. 저 금관을 보라. 늘어지는 귀걸이와 목걸이, 드리운 허리띠와 신발, 그릇과 칼과 말에 채운 것들…. 금령총에서 발굴된 금동신발 하나를 예로 들어볼 텐가. 신발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구슬무늬, 연꽃무늬, 거북등무늬, 괴수, 인면조, 기린, 날개 달린 물고기의 떨리도록 가느다란 선들. 질문은 늘 비슷하다. 이 많은 금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신라는 누구의, 어떤 나라였을까. 국립경주박물관은 과연 그 질문의 답을 찾으려는 곳이자, 또 다른 질문을 만드는 곳이다.

제법 하루가 여물었나. 경애왕릉이 있는 배동으로 갈까. 독락당과 흥덕왕릉이 있는 안강으로 갈까. 우선은 경주박물관에서 오릉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길을 따르기로 한다. 그 길의 풍경이란 여간 한갓진 게 아니라서 항상 일요일을 느낄 만큼이다. 월성 언덕이 있고 그 밑으로 남천이 조심스레 흐르는데 마침 차창 너머 낚시하는 이들이 보이길래 모래톱 쪽으로 가본다. 소년 둘이서 낚싯대를 던지고 있다. 다가가 몇 가지 물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 동갑내기. 물고기를 잡아서 딱히 뭘 하려는 것은 아님. 잡는 재미가 다. 잡히는 것은 주로 블루길이라는 외래종으로, 생태 교란종으로 지정된 놈이라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놓는 것에 별 거리낌이 없음. 미끼로는 그때그때 송장메뚜기를 잡아서 씀. 거의 날마다 나옴. 이방인과의 대화가 잠시 끊기나 싶더니 어눌한 질문 하나가 덧붙는다. 겨울에는 여기서 썰매를 타는가? 답은 답이 아니다. 두 소년은 올봄에 나란히 울진과 부산에서 이리로 이사를 왔고, 아직 경주에서 겨울을 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 그럼 좋은 하루를 보내렴. 슬그머니 돌아서며 몇 가지 두서없는 생각이 드나들었다. 방점은 ‘외래종’에 찍혔다. 유입된 것, 원래 여기에 있지 않았던 것, 금과 은, 왕관의 모양, 서역인상의 얼굴, 무덤을 만든 방식, 여왕과 화랑, 그것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흐름 혹은 역사, 천년이 지나고 난 뒤…. 풍경을 멀리 두고 차를 또한 멀리 몰고 싶어 정혜사지를 향한다. 그곳에 십삼층석탑이 있다. 가면서 새로운 눈이 켜켜이 쌓이는 다른 계절의 하루를 그려보기도 한다.

writer & phorographer : JANG WOO 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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