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t;비너스의 탄생&gt;을 그린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화풍을 닮아 &lsquo;밀레니얼 보티첼리&rsquo;라 불리는 화가. 애나 웨이언트가 그리는 무르릭지 않은 감정, 미결의 이야기

한눈에 궁금증을 자아낸다. 추락하는 모습을 그렸을까, 단순히 뒤집힌 그림일까? 캔버스 속 인물은 기쁜 것일까, 화가 난 것일까? 지난 5년 동안 쉽게 읽히지 않는 표정에 소녀와 여성 사이의 앳된 인물을 그린 그림들이 미술 시장을 연달아 놀라게 했다. 세피아 톤을 중심으로 차분한 컬러 팔레트에 담아낸 암시적인 구상 회화들이 갤러리의 하얀 벽에 걸리기 무섭게 판매되었고, 옥션에서 가격 상승세는 기하급수적이었다.
1995년생 화가 애나 웨이언트는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녀는 캐나다 캘거리에서 태어나 목가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을 졸업하고 항저우의 중국미술학원(China Academy of Art)에서 수학한 후에는 뉴욕에서 작가 경력을 시작했다. 웨이언트는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발을 디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갤러리 가고시안의 전속 작가 목록에 이름을 올리며 천군만마를 등에 업었다.&nbsp;

2022년 열린 애나 웨이언트의 전시 <Baby, It Ain’t Over Till It’s Over>. photograph by Rob McKeever, courtesy of Gagosian.

그녀가 그리는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볼륨감 넘치는 신체, 탐스러운 머릿결,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지만 어떤 이상적 인물을 정형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어딘가에서 마주친 것만 같은 익숙함을 자아낸다. 반면에 분위기나 표정, 구도, 비율 등에 가미한 초현실적인 터치 때문인지 전체적으로는 기묘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화풍에 착안해 많은 이가 작가에게 &lsquo;밀레니얼 보티첼리&rsquo;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루벤스, 프란스 할스(Frans Hals) 등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가 또는 발튀스(Balthus), 존 커린(John Currin) 등 20세기의 화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신인 작가를 자극하는 주제는 현재적이다. 영화, 팝 음악 등 대중문화가 생성하고 소셜 미디어가 확산시키는 성과 신체, 정체성, 아름다움 과 관련한 고정관념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2019년에 치른 첫 번째 개인전 &lt;Welcome to the Dollhouse&gt; 역시 토드 솔론즈(Todd Solondz)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 제목을 따왔고, 웨이언트가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인형의 집을 그림으로 재현해 그 안에 머무는 어린 소녀들을 등장시켰다. 지금보다 좀 더 단순하고 매끈한 스타일의 작품이었다.&nbsp;

<Loose Screw>, 2020, Oil on Canvas, 121.9×91.4cm ©Anna Weyant, courtesy of Gagosian.

<Wit of the staircase>, 2020, Oil on Canvas, 121.9×91.8cm ©Anna Weyant, photograph by Rob McKeever, courtesy of Gagosian.

이제 소녀들은 조금씩 성장했고 한층 드라마틱해졌다. 대부분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지만 아직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발언으로 완성되지는 않았다. &ldquo;공포, 절망, 고립, 무시, 때로는 공격성이 있다. 그곳에 유머의 자리도 있기를 바란다&rdquo;던 화가의 설명처럼 젊은 여인들은 세상이 자신을 보게 하고,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듯 눈짓, 몸짓과 표정이 도드라진다. 필라테스를 하고, 자신과 타인을 넘나드는 권력관계의 미묘함을 체감하고, 파티를 즐기고, 은밀한 공간에서 감정의 범위를 넓힌다. 불안과 자유를 양손에 쥔 채 마음껏 미성숙했던 시절을 지나고 있거나 이미 지나친 이들에게 기억의 조각을 상기시키는 초상 회화다. 그 덕분에 &ldquo;웨이언트의 그림은 널리 이해되고 널리 읽힐 수 있는 일종의 언어를 지녔다&rdquo;는 평을 받는다.&nbsp;
그런데 애나 웨이언트가 포착하는 장면이 더욱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초상화 사이에 자리한 정물화다. 꽃을 꽂은 화병, 과일 바구니처럼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되 약간의 흠결을 드러내고, 희미한 위트를 가미할뿐더러 시듦과 피어남을 나란히 둔다. 가령 테이블 위에 거리를 두고 놓인 화병 두 개를 그린 &lt;It Must Have Been Love&gt;(2022)는 어쩐지 처연하고 불안정한 정물화다. 고요한 정경이라는 것을 쉽게 누리기 힘든 지금 시대, 그녀의 작품에서 마주하는 내밀한 장면은 혼란스러운 인물들을 잠시나마 진정시키는 것 같다. 감정이 배제된 듯 보이지만, 그래서 그 어떤 감정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

<Cheerleaders>, 2021, Oil on Canvas, 153×121.9cm ©Anna Weyant, photograph by Rob McKeever, courtesy of Gagosian.

애나 웨이언트의 이야기는 끝맺음을 보류한다. 작년 말 성황리에 막을 내린 가고시안에서의 전시 &lt;Baby, It Ain&rsquo;t Over Till It&rsquo;s Over&gt;의 제목처럼 모든 이야기가 &lsquo;끝날 때까지 끝 난 것이 아니다&rsquo;. 화면 밖의 우리는 추락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고, 파티를 즐기던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이유를 모른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얼굴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끝끝내 바라보지 못한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서툰 추측, 서늘한 잔상만이 우리를 따라나선다. 
자신을 둘러싼 시장의 소란한 움직임 앞에서 웨이언트는 애써 냉정을 유지한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외부의 관심에 조심스럽게 대응한다. 오직 그림으로 진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여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애나 웨이언트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L&rsquo;OFFICIEL(이하&nbsp;LO) 당신이 그린 첫 번째 그림을 기억하나? ANNA WEYANT(이하 AW) 초등학교 2학년 때 색연필로 산타클로스를 그렸다. 그 그림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던 것이 기억난다.
LO &lsquo;소녀 시절에 겪는 심각하지 않은 트라우마&rsquo;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드러냈다. 본인을 어떤 소녀로 기억하나? AW 이 질문을 받고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는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말씀하시길, 나는 조용했고, 강아지들을 사랑했으며,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LO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특별한 순간이 있었나? AW 2011년 루시언 프로이드(Lucian Freud)가 타계했을 때, 기억하기론 &lt;캘거리 해 럴드 뉴스페이퍼&gt;&lt;캘거리 해럴드 뉴스페이퍼&gt;로 부고를 접했다. 그때 처음으로 프로이드의 작업에 대해 알게 되었고 왠지 마법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을 보자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LO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당신에게 의미하는 것은? AW 그림은 나의 전부다. 
LO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을 딛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본인을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하는가? AW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형편없다. 이미지를 활용하는 쪽이 내게 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이야기의 차례가 들어맞거나 논리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마치 꿈(혹은 악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LO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집중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AW 빛과 그림자가 중요하다. 
LO 남자가 등장하는 그림이 매우 드문 편이다. 남성의 모습을 그린다면 어떤 남자가 가장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나? AW 아빠. 아빠를 몇 번 그린 적이 있다. 아빠는 인내심이 많은데 대개는 그저 잠들어버리신다. 
LO 당신의 초상화와 정물화는 언뜻 닮은 듯 보이지만 분명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초상화와 정물화를 그릴 때 어떤 차이가 있나? AW 초상화와 정물화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라고 묘사하기가 힘들다. 각각 내 안에서 다른 음을 울린다. 때로는 그것을 저녁 식사와 디저트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LO 감정의 동요를 그려내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젊은 여성으로서 당신은 감정의 어떤 면에 집중하나? 혹여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는 감정이 있는지도 알려달라. AW 나 자신을 분노나 수치심 속에서 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감정이 가끔 나를 건드릴 때가 있지만 그것을 내내 짊어지고 지내도록 스스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LO 뉴욕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이전부터 예술가로서 뉴욕에서 사는 삶을 꿈꿨나? AW 기억하는 한 뉴욕은 언제나 나를 매료하는 도시였다. 
LO 지금까지 완성한 작품 중 가장 특별하게 여기는 그림을 한 점만 꼽는다면? AW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반려견 베어(Bear)를 그린 적이 있다. 2020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린 그림이 있는데 캐나다에 거주하는 부모님 댁에 보관하고 있다. 
LO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AW 캔버스에 이미지를 옮기기 전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에 다음 작품 시리즈를 위한 준비용 스케치를 하고 있다. 
LO 만약 예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나? AW 생명을 구하는 일.

editor Lee Ga Jin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gosian

‘밀레니얼 보티첼리’라 불리는 화가

Tags

Recommended posts for you

Art & Culture

첫 문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People

모델에서 배우로, 또 세계로. 무대를 확장하는 미요시 아야카

Beauty

공깃돌처럼, 조약돌처럼

FASHION

따스하고도 서늘한

FASHION

너와 함께라면 그 어디든

FASHION

정건주,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FASHION

닿는 순간, 마법처럼 빠져드는

Jewelry & Watch

아름다움의 윤회